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발없는 말과 보법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누가 더 빠를 것인가?
-
홍륜이 무당파의 기재에 대한 소문이 중원에 새 바람을 몰고 오길 기다리는 동안 달이 한번 떠올랐다 졌다. 그런데도 중원은 잠잠했다. 처음에야 발없는 말이라는 것도 무림인의 발보다는 느린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무당에서 소문을 잠재우고 있는 건가. 홍륜은 그렇게 생각하며 연무장에 벌렁 드러누웠다. 멀리서 사제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것을 무시하고 홍륜은 기지개를 폈다.
"으-차차차."
지루하다. 그게 홍륜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감각이었다. 한번 상대를 만나서 신나게 날뛰어 본 몸은 다음 번은 언제냐고 재촉하는 것 처럼 항상 최선의 상태였다. 그러면 뭐하나. 홍륜이 싸우고 싶은 상대는 지금 이 연무장이 아니라 무당산에 있었고 함부로 싸울 수 없는 상대였다. 화산의 대사형이 무당파의 일대제자와 싸워서 서로 상처를 입혔을 때의 파문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사제의 잔소리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산파 어른들의 잔소리가 쏟아질게 뻔했다. 이번 대회 같은 일이 특수한 기회였다. 홍륜은 잔소리할 거리를 찾았다는 듯이 소매를 휘두르는 사제를 힐끗 올려다 보았다.
"연무장에서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아, 시끄럽네. 목이 너 잔소리가 좀 늘지 않았냐?"
목패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최근 부쩍 늘어난 잔소리를 해댔다. 그 뒤에서 덩치만 커다랗지 유순한 결후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두 사형의 갈등을 어떻게 막을 까 고민하고 있었다. 사부의 뜻이야 어쨌든 두 사제는 대회에서 느끼거나 배운 점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홍륜만을 위한 대회였을지도 몰랐다. 혹은 무당파를 위한 대회였거나 혹은 두가지 다였거나. 사부는 그 청아한 얼굴 뒤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걸 홍륜은 알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일대 제자라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으면 꼴이 사납답니다."
"사부님."
세 사람은 다가온 기척에 한 목소리로 입을 모아 대답했다. 홍륜도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섰다. 풀어 헤쳐진 사형의 앞섶을 보면서 목패가 잔소리를 하고 싶은 걸 꾹꾹 눌러참는게 보였다. 화산파의 대사형으로서의 몸가짐이 어떻다던가, 명예에 먹칠을 한다던가. 홍륜이 듣기에는 정말로 아무런 뜻도 없는 이야기였다. 무력이 모든걸 말해주는 무림에서 대회에서 보여준 추태는 싹 잊어버리고 옷차림에 대해서 떠드는 걸 이해해줄 아량은 홍륜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홍륜, 그대는 나와 잠시 함께 이야기 하지 않겠나요? 목패와 결후는 새 제자들을 잠시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가자, 결후."
홍륜의 기분이 가라앉아 가는 동안 심염은 적절하게 홍륜과 목패를 갈라 세웠다. 사부에게 일을 맡아서 기꺼이 사라진다는 듯한 태도로 연무장의 중앙을 향해가는 사제의 뒷통수를 향해서 홍륜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자기가 그렇게 부르짖는 화산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한 놈이 말이 많았다. 홍륜은 입꼬리를 한껏 들어올려 비웃어 주고는 처소를 향해가는 심염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
"그대는 무당산에 다녀온 이후로 더 불만이 많아보이는 군요. 분명 얼마전까지는 신나 있지 않았나요?"
"세상에 남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멍청이가 너무 많아서 그럽니다. 무인은 강해지는게 제 일 목표 아닙니까?"
사제니 문파니 하는 건 다 그 다음 이야기라고 말하려다가 홍륜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홍륜이라도 장문인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서 홍륜은 웃고 있는 사부의 손에서 매화차를 받아들었다. 심염이 봄마다 화산의 제일 깊은 계곡에서 첫 꽃잎을 따다가 곱게 말린 매화 꽃이 하얀 차 안에서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화산의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홍륜에게 심염은 딱 차 한잔만큼을 품을 수 있는 도량이라고 말하면서 차를 내어주곤 했었다.
"곧 때 가 올겁니다. 평화는 길지 않지요. 그대는 곧 기다리는 때를 맞이하게 될겁니다."
"강해져도 싸울 수 없는건 너무 보람 없는 일 아닙니까."
홍륜은 차에 입술만 살짝 대고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더 강해지기를 원한다. 문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며 장문인이니 대사형이니 사제니 하는 것은 모두 그러다보니 생겨난 허울일 뿐이 아닌가. 그게 홍륜의 생각이었다. 정말로 화산을 위한다면 절정 고수가 되면 된다. 마교가 다른 모든 정파를 합한 것과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는건 단순히 신도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절정고수의 숫자가 많아서라는걸 모른채로 화산의 체면이 어떻느니 말하는것이야 말로 화산의 체면에 먹칠을 하다못해 벼루를 던지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꼴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떠오르는 게 있군요. 저는 세명에게 얼굴을 보였는데 한번은 자의로 두번은 타의였습니다."
" 그, 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대개 무인의 도라든가 협이라든가 의라든가 하는 것들은 선문답에 가까워서 홍륜은 왜 심염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화제에 대해서라면 홍륜은 재빨리 스승에게 사죄를 할 이유가 있었다. 당신에게 화산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겠다고 말하던 심염의 차가운 얼굴을 홍륜은 알았다. 그 얼굴이 곧 의는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방긋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고 해도 그 한순간 드러낸 순수한 투기를 잊을 수는 없었다.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지고 적린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게 되는 기억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처음 자의로 있었던 한번의 이야기인데, 저는 그분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숨겨야한다고 생각했지요. 무림에서 실력의 3할은 숨겨두라고 합니다만 제가 그때 숨겼던건 그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심염은 눈을 내려놓은 찻잔에 고정시키고 말을 이어갔다. 무림에서 실력의 3할을 숨겨두라고 하는건 흔히 말하는 비장의 한 수에 가깝지만 홍륜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홍륜은 입문한 이래 한번도 실력을 숨겨본 일이 없었다. 하다못해 투기를 감추려고 한적도 없었다. 홍륜이 전력을 발휘하지 않는건 그냥 그걸 써볼만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절대로 자신이 위급할 때의 목숨을 건질 수단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이를 들이대고 투기를 발산하고 다닌 지난날이 홍륜에게 새삼스럽게 부끄러운 과거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홍륜에게 소월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째서 입니까?"
소월을 보았을 때 홍륜은 알았다. 자신과 동종의 존재였다. 투기에 꼬리를 말거나 천한일이라도 되는 양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같은 투기로 맞받아치는 싸움에 굶주린 얼굴을 봤을 때 홍륜은 지겹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회가 흥미진진해졌다. 앞선 두사람의 대회 따위는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괴물은 자신이 갈고 닦아둔 발톱을 뽐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분을 정말로 좋아했거든요. 제가 소녀적의 일입니다만 그 당시에 하북팽가와 화산파 제자의 결합이라면 결함이 될 것도 없었습니다."
홍륜은 낯선 표정을 보여주고 있는 심염을 바라보았다. 젊고 아름다운 얼굴로 소녀적의 일이라고 하면서 아드막히 먼 일을 떠올리는 듯한 태도만 심염과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홍륜은 그런 태도가 설익었다. 강해지는 데 일생을 바쳐왔다고 생각했던 사부가 자신도 한 때 자신의 무력을 숨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일이 홍륜에게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처럼 느껴졌다. 괴물의 허물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생경함, 아니 생리적인 혐오감 같은게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그리고요?"
홍륜은 찻잔에 들어있는 차를 들이켰다. 혀 끝에 걸린 매화송이를 이로 끌어당겨 짓이겼다. 홍륜의 추궁에 가까운 질문에도 심염은 여전히 소녀같은 얼굴로 자신의 추억 어디쯤을 더듬고 있었다.
"그 때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그분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꾸었던 시절이요. 그렇지만 역시 무인에게 애병은 특별합니다. 저는 적린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지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실력은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추억을 떠올리던 심염의 따스한 기척은 적린을 입에 담으면서는 홍륜이 익숙한 뜨거운 투기로 돌아왔다. 홍륜은 화산의 도니 의니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심염이 말하는 애병에 대한 애정만큼은 잘 알았다. 자신의 뜻에 따라서 움직여주는 수족과도 같은 차가운 무의 편린을 홍륜도 사랑했다. 결국 심염이 실력을 드러내고, 단순히 일대제자가 아니라 장문인이 되어 하북팽가의 가주와는 결혼할 수 없었을 상황이 눈에 보이듯 선했다. 그러나 적린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무기였다. 심염이 걸었을 무도를 함께 해준 애병이 아닌가. 지금은 홍륜의 허리에 걸려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홍륜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심염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적린말입니다만, 사실 연검은 특별히 정도는 아닙니다. 그대는 우수한 자질이 있으니까 보통의 검으로 연습해서 절정 그 이상을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가 적린을 가지고 절정 그 너머를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아집입니까?"
적린에 대한 애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라서 할 수 있는 퉁명스러운 말이 홍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린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연검이라는 이유로 가끔 마땅찮은 표정을 짓는 사숙들이 있었다. 장문인이야 여자니까 연검을 썼지만 너는 어째서냐고 묻고 싶어하는 사숙들의 얼굴을 홍륜은 잘 알았다. 가끔 사제가 못마땅해 할때 짓곤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그게 자신들이 말하는 화산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런 홍륜의 말에도 심염은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아니요. 무인의 자존심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그것이 아집이라면, 중소문파에서 제자를 받는 것도 아집일까요? 기를 모으는 방법이나 그 정순함에서 중소문파는 화산이나 다른 곳보다는 딸립니다만. 그것이 아집일까요?"
"아집이 아닙니까?"
홍륜은 소월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월은 분명히 무당파가 존재한 이후로 최고의 기재다. 하지만 그 소월이 만약 무당파가 아니라 이름 없는 중소 문파에 들어갔다면 지금 처럼 강해졌을 것인가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홍륜이 싸우고 싶어서 소월이 화산파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당파는 화산파 만큼이나 뿌리깊은 문파였다. 거기에 비하면 기의 정순함이나 운기하는 방법에서 이름 없는 문파는 비교할 수가 없다. 화산이나 무당에 속가제자가 되고 싶어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소월 정도라면 어딜 가든지 고수가 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의 나이에 지금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겠냐고 하면 홍륜은 회의적이었다.
"거기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르겠군요. 전에도 말했지만 홍륜, 사람이 제자를 하나만 둘 수는 없답니다. 그대가 보기에는 답답해 보여도 목패도 결후도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고 화산에는 필요한 인재입니다."
"하, 그 얼간이들이 좋은 자질이요?"
홍륜은 반사적으로 비웃었다. 결후는 사형들을 위하는 유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홍륜이 보기에는 보법을 익히고도 우둔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목이는 자신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후하고 자신의 적에 대해서는 각박했다. 그 방심과 자만이 언젠가 그 되도 않는 실력과 결합해서 처참한 결과를 얻을 것이 뻔히 보였다. 좋은 자질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기나 한건가 의심스러웠다. 홍륜의 평가에도 심염은 엄한 얼굴이었다.
"제자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답니다. 하나는 스승이 알고 있는 것을 다 가르칠 수 없는 제자. 다른 하나는 늦어질지라도 다 가르칠 수는 있는 제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스승보다 뛰어나게 될 제자랍니다. 홍륜, 그대만 필요한것은 아니에요. 화산이라는 거대 문파에는 앞의 두 제자도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화산파와 무당파의 대회는 세명이 겨루는 대회였다. 소월이 자신의 대사형이 늦어질지라도 다 가르칠 수 는 있는 제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하면서 홍륜은 적린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었다. 어떻게 보면 공격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었지만 심염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에게 아집이냐고 묻는 건 참을 수 없군요. 저는 정도라고 말하는 길이 아니라 적린으로 더 높은 곳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제가 당신에게 적린을 물려주면 안될 이유가 어디 있죠?"
"어, 그게…"
"더구나, 적린은 멋있답니다."
심염은 무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소녀같음이 듬뿍 담긴 웃음을 하고 있었다. 투기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마주하고 있는 홍륜에게 따뜻한 온기를 심어주었다.살짝 제멋대로지만 그러면 안될 이유는 정말로 없었다. 자신의 애병에 대한 애정과 함께 스승보다 앞서 나가겠다는 그 의지라면 화산의 의로는 충분하다. 그게 심염이 언제나 홍륜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라는걸 홍륜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홍륜은 덧붙인 심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