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은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술병을 들고 있는 것도 무거워 보이는 가냘픈 손가락에서 고개를 들면 애잔해 보이는 얼굴 아래로 얇은 비단에 감싸인 어깨가 하얗게 선명했다. 저 얼굴에 웃음 한자락을 띄우기 위해 기루에 방문한 사람들이 얼마나 은자를 말아먹었을 지 안봐도 눈에 선했다. 다행이라면 오늘 소월의 은자가 털릴 일은 없었다는 건데, 소월이 품속에 가지고 있는 돈을 생각하면 이런 미인이 따라주는 술은 커녕 기루에 발도 못 붙일게 뻔했다. 이 행운은 같이 온 남자 덕분이었다.
"소랑! 이 약화루가 자랑하는 춘월의 미모가 어떠한가?" "어머, 홍륜님도."
춘월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살풋 웃었다. 교태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어내면 저럴까 싶은 웃음을 짓는 춘월의 머리에서 고운 장식이 반짝거렸다. 행운인지 원흉인지, 소월은 기루에 들어서면서부터 홍륜을 반기는 소리에 깜짝 놀랐었다. 무당산 아래의 작은 기루에 비교할 수도 없는 미인들에다가 소월은 결코 겪어본 적 없는 환대였다. 잘생기고 강하고, 돈도 많고. 새삼 생각해보면 인기가 없을리 없었다. 거기에 말을 이해하는 꽃 취급이 일상인 기녀들에게 숙녀라고 부르는 홍륜은 과연 인기있을 법 했다.
"무당산 아래의 기루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의 네명을 모두 합쳐도 춘월의 미모에 따라올 수나 있을까? 소랑이 나와 싸울 수 있게 혼은 남겨주렴, 춘월." "홍륜님도 참. 그러나 설마, 소랑이 이렇게 훤칠한 대협이셨다고는."
소월이 네명을 불러놓고 술을 먹었다는 부분이 호승심을 자극한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홍륜은 웃으면서 기녀들 사이로 사라졌다. 소월은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비웠다. 깔끔하게 목 뒤로 넘어가는 맛이 싸구려 죽엽청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소하 사제라면 무슨 술이라고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소월의 얕은 지식으로는 무슨 술인지 이름도 알기 어려웠다. 그런 소월에게 눈도 찌푸리지 않고 술을 다시 따라주는 춘월은 옆모습까지도 고왔다. 소랑과 함께왔다고 하면서 홍륜이 자신을 가리켰을 때 기녀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소월은 춘월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 춘월의 얼굴에 살짝 돌고 있는 홍조는 소월 때문이 아니라 기녀들 사이로 사라져버린 홍륜 때문인게 분명했다.
"아, 그런 오해를 자주 받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번을 해도, 남의 말을 안듣는 녀석이라서. 저녀석이 원래 그런놈인건 아시죠?"
"네에, 저희 기루에서도 다른 손님들과 종종 싸우고는 하신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정이 담긴 표정으로 멀리서도 빛나는 홍륜의 금발을 잠깐 응시하는 태도에서 그 싸움의 이유가 짐작이 가서 소월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어딜가나 기녀들에게 환대 받지 못할 팔자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술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소월은 술잔을 다시 비웠다. 역시 좋은 술이었다. 뭔가 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머리를 굴려도 딱히 생각나는 이야기가 없었다. 남자들이 자기 앞에서 입을 못 떼는 걸 숱하게 보아왔을 춘월이 웃는 동안 소월은 손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서 고민을 이어갔다. 보통은 믿지 않는 상대들 앞에서 자신이 무당 장문인의 제자라고 이야기하고, 무당파와 화산파의 대결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미 춘월은 소월이 무당의 도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때 그 대결 이야기를 꺼내면 홍륜이 신나서 끼어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럼 그것 대로 춘월은 행복할지도 모르겠지만 소월은 믿어주는 사람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용기는 없었다. 소월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좋은 술이었지만 꽤나 독한 술인 듯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그렇다고 기를 운용해서 술기운을 빼는 것도 영 멋이 없어서 소월은 춘월이 내미는 술병에 잔을 대고 기를 흘려넣었다. 술병에서 잔을 타고 술이 흘러 넘쳐서 소월의 소매를 적셨다.
"어, 어머 제가 이런 실수를, 공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아, 아닙니다! 제가 미인의 술을 받다가 손이 떨린겁니다. 이정도는 잠깐 바깥바람을 쐬고 오면 금방 말라요."
홍륜이 이쪽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한 소월은 재빨리 둘러댔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홍륜이 싸우자고 덤벼들면 홀딱 넘어가버릴지도 모를일이었다. 청년영웅대회라는 곳에 참가한 상황 자체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만 투기, 그건 확실히 소월의 피부를 따끔따끔 찔러올 때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십년 자제력이 그렇게 얄팍하다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홍륜이 상대라면 아무래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소월은 말리는 춘월의 손을 피해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서 약화루의 연못을 비추고 있었다. 호수에서 끌어와 연못을 조성한 정원이 있는 기루라니 소월이 감당하기에는 역시 버거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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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연못의 한쪽에 위치한, 달빛을 받아서 반짝거리는 수면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에는 달에서 잠시 내려온 항아가 있었다. 소월은 술로 축축해진 소매를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서 눈을 비볐다. 수면에서 반사된 달빛을 받으면서 항아가, 아니 그의 대사형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항상 쓰고 다니는 두건은 어딘가에 벗어둔 채로 넓은 소매자락은 정자 바닥에 늘어트리고 손 안에 든 잔을 굴리는 옆모습이 달빛조차 미끄러질 듯 단아했다. 지금 이자리에 달에서 산다는 항아가 와도 저 미모에 져서 울고 갈게 분명했다. 춘월이도 이 광경을 보면 울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소월은 숨을 죽였다. 달빛이 눈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월은 눈에 힘을 주어 부릅떴다. 혹시나 눈을 감아서 달로 미인이 올라가버린다면 슬픈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소월은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소월이냐? 오랜만에 형님과 술 한잔 하자꾸나."
거리감 없는 호칭에 형님도 취한것 같다는 말을 소월은 꿀꺽 삼켰다. 손 안에 굴리던 잔을 지서가 소월에게 내밀어서 소월은 천천히 실에 잡아당겨지듯이 정자로 올라갔다. 월궁항아에게 초대를 받은 신선이라도 된 기분으로 소월이 지서의 손에서 넘겨받은 술잔은 특유의 찬 기운을 잃고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온기를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소월은 술잔을 비웠다. 아까 춘월이 따라주던 술보다 좋지는 않았지만 따라주는 사람은 더 미인이었다.
"어쩐일로 여기에 계십니까? 형님." "아아, 무림맹의 친선 구축이라고 오대세가의 젊은 기재들이 술자리를 열었는데, 저쪽
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황보패 대협은 제갈연 소저에게 마음이 있기라도 했는지 시끄러워져서 자리를 피해왔지."
귀를 기울이면 익숙하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주의를 기울이려던 소월은 마음을 접었다. 눈 앞의 미인에게 집중하면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홍륜이 아마 자신을 굳이 약화루까지 끌고온 걸 생각해보면 아마 목패가 저쪽의 모임을 주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저쪽이라고 저 어디쯤을 가리키는 지서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면서 소월은 자신의 소매에서 술냄새가 훅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나오기 위한 선택이었고 좋은 술이어서 그런지 냄새가 역겹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일부러 술을 쏟은 소매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그에 비하면, 그의 형님은 술을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는 것 같은 향이 났다.
"무당파는 다 술도 못마시고 놀 줄도 모르는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형님." "도사니까 어쩔 수 없지. 사숙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소월이 재미있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지서의 시선은 술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데 잔을 두 개 챙겨오지는 않았을 터였고 그 술잔 하나는 지금 소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술병에 바로 입을 대고 마시기에는 언제나의 반듯하고 절도 있는 동작이 아니라 고민하는게 그 옆모습에서 느껴졌다. 얇은 비단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얀 옷에 감싸인 어깨가 계속 소월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술 따라드릴까요?" "...소월아."
이럴땐 술잔을 돌려주는게 예의일것 같아서 소월은 그렇게 물었다. 형님 보다는 자신쪽이 술병을 들고 마시는 게 익숙하고 또 잘어울렸다.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건네는 소월에게 지서는 손을 까딱거렸다. 술잔을 달라는 건가 했지만 고개를 젓는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소월이 어리둥절 해 있는 동안 지서는 손을 뻗어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월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어른이 되어서 칠칠 맞게 뭘 묻히고 다니는 거냐? 항상 얼굴도 단정해야지."
소월은 자신의 뺨을 문지르고 돌아간 손가락 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냘픈 여인의 손가락이 아니라 하얗기는 해도 선이 굵고 단단한, 단련을 거듭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손이었다. 그러나 달빛 아래에서는 박 속처럼 희었다. 소월은, 손을 내밀어서 멀어지는 손을 잡아채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물기어린 입술에서는 방금 마신 술의 향이 났다. 그 향에 자신이 마신 술의 향기가 섞이는게 소월의 마음을 달뜨게 해서 소월은 꼭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형님은 당황한듯 웃고 있었다. 소월이 실수를 했을 때 자주 보았던 인자한 웃음에 소월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주댄 입술은 아직 떼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