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가 죽은 후에 그 유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페스나 네타에 주의해주세요. 그 외 설정오류나 캐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처의 사망소재를 위해 썼을 뿐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저격 의도는 없습니다. 비중은 적지만 생전 아처와 린이 사귀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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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처가 죽었다.
처형은 여름인데도 이파리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한그루 서있을 뿐인 마을 한 구석에서 집행 되었는데, 구덩이에서 끌려나와 나무 아래 무릎을 꿇려질때까지 아처의 굳게 다물린 입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은 한마디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망자의 눈을 가려주는 역할을 맡은 남자는 그 눈에는 전혀 눈물이 고여있지 않았고 깜빡거리지도 않은 것이 그 악마가 자신에게 주술을 건게 틀림없다고 남이 사주는 술을 마시며 떠들어댔다. 역시 악마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악마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을 뛰어넘고 나서야 집에 들어갔다. 생전에 의족을 선물받은 소년과 고국의 음식을 얻어먹고 조리법을 배운 어린 신부는 불길을 향해 침을 세번 뱉고 연기를 향해 알고있는 욕을 모조리 퍼부었다. 악마가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었다는 말에 병사들은 채갈 때와는 다르게 그가 애용하던 무기를 구덩이에 밀어넣고 흙으로 덮어 재를 뿌렸다.
그리고 바람이 살랑이는 선선한 날씨에 누구였던가, 아마 사람이 소심하다는 평을 듣는 사내였는지 아니면 맨 처음 악마에게서 무기를 빼앗았던 젊은이였는지 확정하기는 어려웠지만 누군가가 꿈을 꾸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악마가 꿈에 나타나 자신의 유품을 고향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마을의 우물을 말라붙게 하겠다는 저주를 걸었다고 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때 그를 가뒀었고 마지막에는 무기를 넣고 덮어버린 구덩이 앞으로 몰려갔다.
"......"
파낸 구덩이에서 나온 총은 삭아있었다. 활은 커다랗고 곧은 모양을 잃고 몇개로 동강난 채로 칼만 먼지를 뒤집어 쓰고도 날이 그대로였다. 과연 악마의 무기라고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는 발로 땅을 팠다. 부정에는 부정이라는 어르신의 말대로 초경중인 어린 신부가 칼을 천으로 감쌌다.
"그래서? 어디로 보내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칼을 보내야할 주소를 몰랐다. 생긴것부터 이질적이었던 낯선 사람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것은 지극히 적었다. 런던? 일본? 사람들은 알고있는 대로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영국. 런던. 런던탑. 누구에게? 런던의 린. 린이 누구야? 검은머리 여자. 몰라? 몇년전 까지는 남자와 같이 다녔어. 가족이야? 모르겠는데.
린이 누구든, 가족이든 아니든 남자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을 것 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소년은 도시로 나가 짐을 붙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제를 만나는 대신 소년은 여비로 술을 사마셨다. 의족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 만 같았다. 마을에 돌아와서는 사제님이 주신 술이라고 얼버무렸다. 어쨌든 유품을 보냈으니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편하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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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 린은 소포를 하나 받았다.
낯선 필체로 적힌 낯익은 이름을 본 순간 린은 상자의 내용물을 직감했다. 절대로 오래 살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건 너무 짧았다. 수신인에는 런던탑의 린이라고 적혀있었다. 에미야 시로가 린을 이름으로 부른건 아주 오래전 잠깐의 일이었는데도. 그녀는 낡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서 존재할 리 없는 냉기가 전해져서 손 끝부터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참, 별거 없네."
검을 담아야 하는 만큼 상자는 조금 커다랬지만 그게 다였다. 린은 한때나마 같이 다니면서 에미야 시로가, 나중에는 아처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더 많았던 그 사내가 동료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작은 손편지와 함께 소포를 부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보통 가슴에 품고 다니는 가족 사진이라던가, 시계라던가 의미는 없는 군번줄 같은 고인의 물품과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위로하는 편지가 함께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어느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천 사이에 삐져나와있는 검의 손잡이에 감은 천에는 얼룩한 흙물이 들어있었다. 린은 그 손잡이 끝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에미야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고 몇번이고 말했었는데."
에미야군이라고 말하면서 린은 한번 숨을 골랐다. 학창시절부터 말했던 부분인데 우둔한 제자이자 미련한 애인이었던 남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것 같았다. 동료라고 해도 누구나 같은 이상을 공유하는건 아닐텐데. 어쩌면 누군가는 그저 총을 든 모습이 멋있고 폼이 난다는 이유로 산발적인 전투에 참여한것 뿐일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굶기 싫었을수도 있었다. 어쨌든 같은 길에 있다고 해서 모두 정의의 사자가 될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사실은 정의의 사자가 되고 싶다는 쪽이 말도 안되게 소수다. 그걸 알고 있을텐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남자의 행동은 린이 보기에 한결같은 어리석음이었다. 언젠가 단 한명의 악의로도 터져버릴 화약을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결국 그게 터진 결과가 검 두자루로 남았다.
린은 상자를 다시 덮었다. 이 상자를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이 검이 돌아갈 장소라고 하면 역시 휴유키시 밖에 없었다. 그리고 휴유키시에 남아있는 에미야 시로의 가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딱 하나 뿐이었다. 린은 상자에 작은 손편지를 넣었다.
'에미야 시로가 아끼던 검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던가, 그의 희생으로 동료들이 얼마나 구해졌다던가 하는 상투어구를 붙이지는 않았다. 맹한 주제에 통찰력만은 넘치는 상대에게 보내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말들이었다. 대신 린은 상자에 작은 마술을 걸었다. 에미야 시로를 알고,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만 상자를 열 수 있도록 한 그녀는 휴유키시로 소포를 다시 부쳤다. 자신이 꽤나 중대한 실수를 한것을 깨달은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우표가 잔뜩 붙어있는 상자를 받아든 말단은 수신인의 이름을 소리내어 읽었다. 둘째가 걸을 수 있게 되었다며 한주 전에 왔다가 폭풍처럼 떠나간 아가씨의 처녀적 이름과 그녀가 종종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시로 삼촌의 이름이 제법 무게가 있는 낡은 상자에 적혀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정도로 부쩍 커버리고 멀리 떠난 남자를 아이들이 실제로 본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낙타를 타고다니면서 사람을 돕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으면 엄마대신 혼내줄거라는 삼촌이 인상 깊었는지 후지무라조에 오면 종종 시로 삼촌은 없냐고 묻곤 했다.
"그런데 이 상자말이야." "...유품 같지."
그런 훈훈한 추억과는 별개로 상자는 아무래도 딱 한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곳 저곳을 떠돌아 고향의 몇년도 더 지난 옛주소에 도착하는 물건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누님이 슬퍼하시겠군. 남자는 혀를 차며 상자를 열었다.
"어?" "왜 그래?" "안열리는데?"
허름하게 붙어있는 테이프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톱으로 테이프 끝을 긁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리 줘봐, 내가 해볼게."
품에서 칼을 꺼내어 테이프 위로 그어봐도 상자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언제나 날을 제대로 갈아두는 칼인데도 테이프도 상자도 그대로였다. 등 뒤로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걸 애써 무시하며 남자는 상자의 가운데에 맞춰서 칼을 힘을 주어서 내리찍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튕겨나갔을 때 주위에 둘러서있던 모두는 오한이 솟구치는걸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귀, 귀신...!"
"재수없는 소리하지마!"
"류도사에 보내야 하는거 아냐?"
누님이 슬퍼하시겠다고 말한것도 잊어버리고 다들 류도사에 보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몇년전 까지 가스 폭발로 무너진 성당 교회에 다니던 야쿠자들은 용한 젊은 스님이 있다는 류도사로 많이 이동해 있었다. 아무래도 가끔 용서를 빌러가지 않으면 안되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누가 용하다던가 망자의 원한을 풀었다던가 하는 말에는 민감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소포를 떠넘겨진 말단은 그대로 상자를 끌어안고 류도사로 향했다. 가는 길에 술을 사서, 산길의 계단을 한참 올라서 류도사에 도착할 동안에도 상자는 여전히 밀봉된 상태 그대로였다.
안경대를 밀어올려 고쳐쓴 스님은 염주를 고쳐쥐고 상자를 들여다 보았다. 어딜보나 평범한 상자에는 그리운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여전히 명랑하고, 주위에 행복을 뿌리고 다니는 은사의 이름과 어떻게 죽더라도 원한을 가질리 없는 동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잇세는 남자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각날때마다 들인 공이 허사로 친구는 류도사에 잇세를 보러 오기는 커녕 유품마저 이렇게 귀신들린 물건 취급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그 공 덕분에 그 성정에 유품이나마 이렇게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건 에미야 시로라는 인간의 생에 대한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잇세는 한발짝 멀어져 있는 남자를 곁눈질 하고 상자에서 테이프를 떼었다.
"오!"
여태까지의 굳건함이 무색하게 상자는 활짝 열렸다. 남자는 역시 젊은 주지 스님이 용하다며 합장을 했지만 잇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에미야 시로는 남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인간도 못되었다. 그보다는 남의 원한 같은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리는 통만 큰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의 유품이 검 두자루라는게 어떻게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의 손잡이에는 낡고 때묻은 천이 감겨있었다. 에미야 시로가 아끼던 검이라는 누군가의 쪽지를 잇세는 몇번이고 읽었다. 그가 알던 에미야 시로와 어딜보나 실전용의 칼을 애용하는 사람이 매끄럽게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계속 연결고리가 미끄러지는 느낌에 잇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친구를 위해서 계명을 지어주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에미야 시로와 유품을 남긴 망자는 이미 꽤 다른 사람이었다.
"에미야 너는 언제나 도를 지나친다고 했지 않았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기가 알던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나갔을지는 상상이 가서 잇세는 그렇게 말하며 유품을 갈무리했다. 도를 지나치기 쉽다고 할까, 무너지기 쉽다고 할까. 고등학생 때에도 벌써 그랬던 녀석이니 장수할 성격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면 남을 도와주고 있는 주제에 자신의 장례식을 치뤄주겠다고 하면 귀찮지 않겠냐고 물어 올 것 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잇세는 조금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