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딩요->세모 묘사가 있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이 전력으로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이 AU에서 리모는 원래 은발로 태어났고 흑발은 염색이라는 설정입니다. 다음 편은 림동솔의 과거!
아이들이 생각보다 늦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운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도성을 시끄럽게 헤집고 다니는 세명을 걱정하는건 아니었다. 그보다 도운이 걱정하고 있는건, 맞은편에서 딸기를 듬뿍 얹은 타르트를 우아한 태도로 빠르게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분홍머리 소녀의 위장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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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먹고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고 궁에 방문한 딩요는 으례 산책때 들고 나오는 활이며 옷가지들을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숨긴 채 리모에게도 받을 물건이 있다며 리모 역시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안주인이 없는 채로 너무 오래 지낸 궁성의 사람들이 아끼는 작은 아가씨를 위해서 성대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는걸 적당히 물리치고 나서야 세모가 성녀님과 관련된 일로 자신과 리모를 불러달라고 했다며 전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아가씨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드셔보세요. " "...감사합니다."
하나, 두리와 세모가 도성 바닥 어디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기라도 하는 지 돌아오지 않으니 안절부절 하는건 도성의 시종들 쪽이었다. 그 셋이 저녁에 궁의 담을 훌쩍 넘어서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일이 흔하다는건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훌쩍 자라버렸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작은 아가씨가 수줍은 연심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 도운과의 저녁식사를 핑계로 왔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딩요가 리모를 부른 일도 그들에게는 그 상대의 부모님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착각될만한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가겠다고 딩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차와 다과상을 내오는 모습에 도운은 헛기침을 해서 웃음을 가렸다. 어떻게 말을 전했는지 딩요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단 음식들은 요리장이 작은 아가씨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 넣은 역작같은 것이 되어있었다. 하기야 대 화재로 리모와 도운이 아내를 잃은 후로 궁에 아가씨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딩요밖에 없긴 했지만 어째서 이렇게 까지 이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는 모습을 보이는 지 모를 일이었다. 딩요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기운 없어보이는 얼굴로 돌아가자 몇몇 사람들은 안타까워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바람맞은 딩요의 방문이 밖으로 새어나갈 것 같지는 않아서 도운은 대신 시선을 리모 쪽으로 돌렸다.
어쩌면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하나 없이 자기 앞에 놓여진 작고 예쁜 음식들을 하나 하나 해치워가기 시작한 딩요를 시종들이 저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는건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리모의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아 보여서 일수도 있었다. 퀭한 얼굴로 차에 우유를 붓고 있는 리모는 흑마법사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서 젖힌 시커먼 후드의 소맷자락에 얼룩을 남기고 있는 하얀 돌가루들은 리모의 머리에도 뽀얗게 얹혀서 리모의 머리를 거의 하얗게 보이게 했다. 뿌옇게 된 차에 설탕 막대를 넣어 휘휘 젓는 리모의 모습에 누군가는 가루가 떨어질까 기겁할 모양새였다. 하지만 대도국 출신도 아니고 왕제국의 귀족에게, 혹은 마탑에 박혀서 뭘 하고 사는지 모르는 수상한 흑마법사에게 그런 걸 지적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자를 들이기 전에는 마물들을 상대로 이상한 실험을 하느라 저 소맷단에 돌가루 대신 핏물이 배어있던 시절을 알고 있는 나이먹은 시종일 수록 더 그랬다. 물론 흑마법사 뿐만 아니라 백마법사들 까지 해서 마법사들은 전반적으로 괴상한 종족이라는걸 하나 왕자님 덕분에 추가로 알게 되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왕인 도운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리모 자네, 얼마만의 식사인가?" "어...세모가 사막으로 간 게 며칠전이지?"
예상했던 대답이어서 도운은 놀라지 않았다. 사막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걸 들은 날 부터 리모는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그나마 양자인 세모나 되야 그 고집불통에게 밥을 먹이고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게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꼴을 보니 세모가 없는 동안은 먹지도 자지도 않았을 게 뻔했다. 그 모습에 끼니를 거르고 마법 수식을 연구하다가 가끔식 자기 거처를 폭파시키는 하나가 떠올라서 도운은 이마를 짚었다. 마법사들이란 이렇게나 상식 밖이다. 어쩌면 그게 리모를 아버지로 두고 하나를 친구로 둔 세모가 마법을 쓰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을 마법사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세끼 다 챙겨먹고 제때 자라고는 안하겠네. 하지만 세모가 걱정하지 않을정도로는 먹고 자두는게 좋아."
작은 아가씨가 잘 먹어서 뿌듯하기 그지 없다는 표정으로 두번째 접시를 들고오는 시종장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도운은 다시 리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나이를 생각하라는 말이 도운의 혀 끝에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하얀머리의 리모는 까마득한 옛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월은 난폭하게 지나가며 도운과 리모, 그리고 왕제국에 있을 소라에게도 짙은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 눈을 감고 도운의 걱정에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는 표정 만큼은 그 옛날과 똑같았다. 소란스러운 연회장의 소리가 흘러들어오던 작은 복도와 신비한 경험들. 하얀머리의 리모를 지팡이 삼아 도운에게는 바로 어제일 처럼 떠올릴 수 있는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