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도 좋고 또일럿 애들도 좋아합니다. 좋은거 + 좋은거 = 아주 좋은거.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쳐 캐릭터들의 캐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오공이가 성녀냐면 꿈에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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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하여튼 차하나 엉덩이 무거운건 알아줘야해."
아무도 없는 텅빈 신전의 회랑에서 두리의 목소리가 텅텅 울렸다. 평상시라면 성녀님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을 신전이었지만 마물들을 물리치기 위한 신탁을 받으러 들어간 성녀님이 기도실 밖으로 나오지 않은게 벌써 나흘째였다. 사람들은 걱정하면서도 오공이 들어가기 전에 한 말처럼 신전 주위에 접근을 삼가고 있었다. 사람이 북적 거리지 않으니 하얀 벽돌로만 이루어진 신전 벽이 이상할정도로 서슬퍼래 보였다. 그렇게 사람들도 없는 신전에 두리가 혼자 투덜거리며 바닥에 앉아있는건 오공이 두리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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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야, 일어나.' "아, 쫌만 더... "
아침에 명상이라도 하자고 두들겨 깨우는 차하나도 없어서 대자로 뻗어자던 두리는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아침에 이런 목소리로 두리를 깨우는 사람이라면 오공밖에 없다. 차하나라면 소리치며 이불을 걷어내는 손길도 따라왔을 것이었다.
'하나, 세모와 함께 신전에 와줄래?' "아 진짜. 신탁 이런식으로 남발해도 되는거야?"
조용히 깨우는 목소리에 두리는 몸을 일으켜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었다. 성녀님의 신탁이라니 신실한 사람이라면 감격해서 울만한 일에도 두리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두리의 머리속이 유난히 단순해서 들어오기 쉬운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공은 이렇게 두리에게만 신탁과도 같은 전달법을 자주 썼다. 처음에야 감격 비슷한 것도 있었던것 같지만 이제와서는 머릿속에 있는 수신전용 연락망 정도의 감흥밖에 주지 못했다.
"온달이는 왜 데리고 오라고 안하지? 아, 사막에 간거 모르겠구나."
명색이 왕자인데 그래도 옷 좀 정리하고 치워주면 안되는 거냐고 투덜거리면서 두리는 어제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주워들었다. 오공이 신탁을 받으러 기도실에 처박힌 게 나흘 전이었고 하나, 세모가 자신을 떼어놓고 사막으로 조사하러 간다고 한게 이틀전이었다. 세모가 그 와중에 형을 걱정하던 온달이까지 데리고 간걸 오공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알면 그 동생을 걱정하는 성격에 기도실에서 뛰쳐나왔을지도 몰랐다.
'참, 지금 당장은 말고 점심 먹고 와도 넉넉할거야.' "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좀 쓰지 말라고! 나도 성녀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싶었거든??"
일단은 신전에 가는 길이니까 평소에 하나가 질색하는 넉넉한 옷들이 아니라 정갈한 축에 드는 옷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던 두리는 허공을 향해서 소리 질렀다. 이런 아차,깜빡했다는 느낌을 주는 신탁따위 딱 질색이다. 성녀님이 아무리 코흘리개 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해도 신탁에 대해서 경건함을 유지하고 싶은 두리의 노력은 오늘도 소용이 없었다. 점심을 먹는 내내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두리를 도운은 잔소리를 하고 싶은 눈으로 바라봤지만 오공의 신탁이 내려와서 신전을 가보겠다는 말에 부정이라도 탈까 입을 다물었다.
"...권셈 진짜 느려텨젔어, 마검사는 무슨 대검사겠지."
성녀의 신탁이고 나발이고 콩알만큼의 경건함도 없다고 투덜거린 두리는 회랑 한가운데에서 빛을 받으며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에서 열매를 하나 땄다. 입안에서 터지는 상쾌한 맛이 두리의 기분을 살짝 나아지게 했다. 신전에 방문하는 사람을 위해 전대 성녀님이 심고 왕제국으로 떠났다는 이 나무를 사람들은 성녀님의 나무라고 부르며 열매를 얻기 위해서 신전 앞에 줄을 서곤 했다.
'불러놓고 마중을 못나가서 미안해 두리야.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으응."
나무를 노려보고 있자니 오공의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두리는 인상을 풀었다. 나무에 해꼬지라도 할까 걱정한 듯 싶었지만 두리도 애는 아니었다. 다만 이 나무는 정말로 성녀님의 나무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괴팍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려면 나무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성녀님의 은혜가 선택적이라는건 이상하지 않냐고 두리가 물은 후로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일은 급속도로 줄어들었지만, 이렇게 종종 방문하면 열매를 잔뜩 매달아서 따기 좋게 가지까지 늘어트린 채로 두리를 반긴다. 나무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돈을 받고 팔아 넘기려고 하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비싼 열매지만 두리한테는 언제나 쉽게 따먹을 수 있는 신전 앞의 나무 열매였다. 지금 성녀랑 친구라고 그러는건가 하고 나무를 노려보면 나무는 언제나 대답 대신 가지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두리형~!" "이제 왔냐?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그 불편하고 쓸데없이 멋있는 대검을 타고 다녀왔으면 온달이를 먼저 신전에 데려다 줄거라는 두리의 예상은 적중했고, 인사하는 온달이를 마찬가지로 팔을 흔들며 반기자 하나와 세모는 어쩐일로 네가 일어나서 신전에 마중을 나와있냐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성녀님의 신탁으로 두분 모시러 왔다 이거야. 왜 이렇게 오래걸렸냐? 그래, 조사하던건? "
다들 느려터졌다니까. 두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뜩 따온 열매를 세모와 하나, 그리고 온달에게 던져주었다. 회랑 안에서 깨끗하게 자랐을 열매에 뭔가 묻어 있을리도 없는데 세모는 어깨에 몇번 쓱쓱 문지르고 나서야 베어물었다. 아무리 봐도 모래먼지와 체액으로 덮인 옷이 더 더러워 보였지만 그게 또 온달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에 가져가려던 열매를 사제복의 넓은 소매자락에 몇번 문대고 나서 깨물어 먹는 모습이 어째 세모를 따라하는 것 같아서 두리는 어째 입맛이 썼다. 언제는 두리 형이 제일 멋있다더니, 이래서 동생 키워봐야 헛고생이다. 정말로 동생을 키운 오공이 들으면 웃을 생각을 하며 두리는 하나, 세모 그리고 온달이와 함께 오공이 기다리고 있을 기도실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