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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에 한번쯤 참여해보고 싶었는데 주최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어서 기쁘네요!
https://yhyjroseday.postype.com/ 이 주소에서 다른 분들의 아름다운 연성도 보실 수 있습니다 ㅇㅅㅇ)*
유현유진 로즈데이 합작
“시제품이 벌써 완성되었다고요?”
“네, 거의 마무리 단계였으니까요. 괜찮으시다면 다음 주에 한번 들려주시겠습니까? 저희 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른 연구도 보여드릴 겸 해서요.”
“일정을 한번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꼭 들러주십시오!”
한유진은 전화를 끊었다. 아침부터 좋은 소식이라며 전화를 걸어와서 이야기를 하는 희희낙락한 목소리는 회귀 전에 수도 없이 받았던 전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의 전화가 그때의 전화와 다른 점이라면 D&L 바이오에서는 실제로 상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내일이 좋겠지? 굳이 늦출 이유도 없고, 월요일이니까 시간도 딱 좋고.’
석시명은 한유진이 D&L 바이오의 사장에게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번호를 주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해연의 법무 팀이나 비서진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대신 빨리 사람을 뽑으셔야겠다고 하고는 일정을 조율할 때는 적당히 바쁜 척 하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굳이 심중에 있는 말을 다 하지 않는 것이 석시명의 장점이었다. 회귀 전에는 한유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는 사람이라서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석시명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못마땅한 기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차가워지는 손끝을 잠시 쥐었다가 펴는 동안 뒤에서 다정한 음성이 날아왔다.
“형, 무슨 전화였어?”
“아, 유현아 일어났어?”
동생이 어깨를 고개에 기대 와서 유진은 떠오르는 기억을 잠시 접었다. 막 잠에서 일어난 동생의 머리카락이 한유진의 옆얼굴을 간질였다. 한유진보다 곱슬기가 더 심해서 한유현은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아침에는 한유진이 앉혀놓고 빗어주기 전까지 머리가 부스스한 몰골로 돌아다녔다. 물론 그런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하고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프로의 손길로 셋팅을 하면 과할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 완성되고는 했다.
한유진은 동생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주면서 잘생긴 뺨에 입맞춰주었다. 입 맞춘 뺨에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내려오면 한유현이 한유진의 손가락에 뺨을 찔린 채 미소 지었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뺨이 손가락 아래에서 눌리는 기분이 좋아 몇 번이고 누르고 있으면 그런 그의 손가락을 동생의 손이 조심스럽게 감싸서 뺨에서 떼어냈다.
“배고파? 아침 먹을까?”
“아니, 아직 배 안고파. 그보다 어디 가게?”
“석시명씨가 말 안 해줬나? 두주 전쯤에 발모제를 개발 하려는 회사가 있기에 투자했었거든. 그게 성공했다고 보러오라고 하네.”
“못 들었어. 그런데 우리 집에 탈모 유전자가 있었어?”
고개를 갸웃하는 한유현의 머리카락은 석시명이 매일매일 중요하다고 언급하는 관리의 영향인지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돌고 있었다. 손을 들어 쓰다듬으면 매끄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한유진의 손길에 따라 한유현의 표정이 점점 만족스러운 것으로 변해갔다.
“우리 집에는 탈모 유전자는 없지만, 탈모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니까 투자했지.”
유진이 기억하기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봤었던 많은 친척들 중에서도 대머리인 사람은 없었다. 돈을 밝히면 대머리가 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속설이 꼭 맞는 건 아닌 듯 했다.
“큰돈이 필요한 거라면 나도 있는데.”
심통 난 듯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고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한유진은 동생의 어린 뺨에 입술을 짧게 갖다 대었다. 한유진의 입술이 떨어진 자리로 한유형의 입매가 올라갔다.
“형도 이제 돈 많다. 그리고 유현이 네가 이미 많이 도와줬잖아.”
“그래도 형이 필요하면…….”
“정말 괜찮아.”
십억쯤은 용돈으로 찔러줄 수 있는 자산가라는 걸 알고 있어도 동생이 피땀 흘려서 번 돈을 그렇게 가볍게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형이 되서 동생이 벌어온 돈을 막 쓰겠냐.”
다리를 다치고 정말 힘들었을 때도 한유진은 동생에게 받은 돈을 쓰지 않았다. 그때는 오기가 섞여있었고 이제 와서는 정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형은 그보다 네가 다치지 않고 던전에서 돌아오는 게 더 좋아.”
“형이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알았어.”
그래도 석시명이 이번에 상급 기승수의 던전 공략 지분에 관해서 말한 게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덧붙이는 동생의 말을 한유진은 한귀로 흘렸다. 피스나 블루가 피땀 흘려서 벌어오는 돈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맘이 편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혹시 한유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유현이 생각하는 한유진이 더 돈에 연연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직 던전이 생기기 이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학원비가 더 든다고 해서 알바를 늘렸던 것이 원인이었을까 하고 한유진은 생각했다.
“나야 기승수를 한번 키워놓으면 앉아서 돈을 버는 거지만 유현이 네가 돈을 벌려면 던전을 고생하면서 돌아야 하는 거잖아.”
요즘은 마수사육소와 한 세트로 취급당해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연의 이미지는 던전공략 위주의 소수정예 길드였고, 그건 한신이나 브레이커 길드처럼 부산물 장사로도 돈을 버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김성한이나 한예림이 있다고 해도 아직 자신의 팀이 갖춰지지 않은 헌터들이었다. 회귀전의 한유현은 책임을 나눠질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던전에서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던전으로 들어가곤 했다. 나중에는 던전이 재생되는 속도가 빨라져서 던전 밖에 있는 시간보다 던전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했다. 한유진은 그 때에는 그게 F급과는 달리 싸우는 걸 좋아하는 S급 헌터라서 그렇다고만 생각했었다.
“형,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형은 최고야. 형이 키워준 피스가 있어서 던전 공략도 더 빨라졌잖아. 그러니까 형이 그냥 밖에서 앉아있기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가 한유진을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다정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동생이었다. 지난 3년간 자기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는지 미안한 감정이 목소리에 담겨있었다. 이즈음의 한유현은 아직 한유진의 기준에는 미안할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랬다. 뺨에 닿은 잠옷 너머로 따끈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한유진은 자신을 끌어안은 동생을 마주 끌어안았다. 한유현이 거기에 있는 한 한유진은 괜찮았다.
**
“그래서, 그 해안절벽 던전 말인데.”
“예림이가 들어간 던전 말이지?”
“응. 그 안에서는 낮과 밤이 바뀌는 주기가 다르다고 했잖아? 거기 보스몹은 그 주기에 따라서 반대쪽 머리가 잠에서 깨거든.”
이틀 전에 블루와 박예림은 각성자관리실에서 관리하는 던전에 들어갔다. S급의 하위 던전이었다. 팀과 손을 맞춰보는 중이니 일반적이지 않은 던전 내 환경을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던전의 보스몹은 한유진도 익히 알고 있는 마수종인 바질리스크였다. 던전이 생겨나기 이전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판타지적인 생물과 던전이 열리고 튀어나온 마수들을 비교하는 특집에 등장했던 마수 중에 하나였다.
“블루와 함께 들어갔으니까 동시에 머리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정석적인 공략은 낮과 밤이 바뀌는 주기를 노리는 거야. 저녁에는 닭의 머리가 잠들고 아침에는 뱀의 머리가 잠드니까 그때를 노려서 잡고나면 일몰도 일출도 없이 노을이 가득 지는데, 그게 굉장히 아름다워.”
“노을이 비친 풍경이 말이지?”
던전 안에서 고생만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지 던전 안의 풍경을 조곤조곤 말해주는 동생의 말에 한유진은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웃는 얼굴에 한유현은 마음이 놓였다. 다른 사람이 던전안에서 상급 헌터들이 고생하며 구른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왕처럼 공략 팀을 거느리며 꿀을 빨고 있다고 생각하든 한유현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이 걱정으로 잠을 설치는 건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형이 걱정해주는 것도, 애정을 담아 과일을 말려주는 것도, 던전 앞에 마중을 나와 주는 것도 다 좋지만 형이 잠을 못 자는 건 싫었다.
“응. 그 풍경을 형이랑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물론 은혜가 있다고 해도 형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야.”
한유현은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 된 형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A급 던전에 가서 SS급 마수가 튀어나오는데 S급 던전에 가서 안 좋은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무엇이 나올 것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던전 말고도 형이랑 가고 싶은 곳은 많은걸.”
“유현아…!”
“형이 키워준 기승수 덕분에 공략기간이 짧아지니까 예전보다 던전 관리 팀도 일정이 넉넉해졌거든. 그래서 팀원들이 휴가도 많이 냈어.”
한유현이 새치름한 얼굴로 말하는 걸 한유진은 바라보았다. 행여나 이쪽이 마음이 상했을 까봐 좋은 단어들만 골라서 말해오는 앳된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내일은 일정 없고.”
한유진은 뭔가 떠오르려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동생의 표정은 꼭, 한참 더 어릴 때의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던전이 생겨나기도 한참 전에, 그래서 이제 손으로 꼽으라고 하면 십년도 더 전으로 느껴지는 옛날에 그의 동생은 저런 어리광을 부리고는 했다. 그때보다 많이 커서 어른이 되어 버린 동생이지만 어리광은 여전히 귀엽게 어울렸다.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한유진은 생각했다.
“그런데 형은 나랑 안 놀아주고 어디 가?”
“그, 유현이도 형이랑 같이 갈까?”
그래서 한유진은 동생의 어리광에 꼭 옛날처럼 말해주고 말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유진이가 돈을 벌어야 해서 일하러가야 했기 때문에 좀처럼 볼 수 없던 유현이의 어리광이었다.
“같이 가도 돼?”
“그럼! 네가 같이 못 갈 곳이 어디 있냐. 예림이도 던전에 들어갔고 같이 갈 사람은 유현이 너 밖에 없지. 데이트로는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형이랑 가는 곳이면 어디든 다 좋아.”
한유진의 말에 한유현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진심을 담은 대답이었는데도 괜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형이 얼굴에 입맞춰주는 것까지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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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장님과 해연 길드장님?”
“아, 저는 한유진 헌터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이 곳에 대한 투자는 마수 사육소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부분이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블루가 사실은 대머리 독수리가 섞여있다던가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발모제에 대한 투자는 사육소와는 무관했다. 빌딩의 소유주가 한유진으로 되어있지만 마수사육소에 대한 지분은 여러 길드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한유진은 자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로 안내하기 시작한 남자의 눈치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건 던전 식물 아닌가요?”
“아, 던전 부산물로 만든 모형입니다. 길드 건물 로비에는 진짜를 세운다고는 들었습니다만.”
해연이나 세성만큼은 아니지만 잘 꾸며진 건물의 로비에는 한유진이 익히 알고 있는 던전 식물이 놓여있었다. F급이긴 했지만 땅 밑에서 솟아나는 가시형 뿌리가 까다로운 식물을 가리키자 남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해연길드가 언급되었지만 한유현은 남자의 말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요? 유현아, 해연 길드 로비에도 있어? 난 왜 못 본 것 같지?”
“저건 정원용이든 과수용이든 별로 적합하지 않아서. 옥상 정원에 다른 식물 종은 있는데 각각 관리해주는 헌터가 따로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는 말에 한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을 가득 채우는 수조 같은 것보단 차라리 제 때 잘라주기만 하면 되는 식물종이 더 관리하기 쉬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런 연구소가 길드의 지원이 끊겨도 고용된 D급 이하 헌터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유진 헌터님! 어서 오세요.”
반갑게 맞이하는 송은진의 얼굴이 밝았다. 그 옆에 서 있는 사장의 얼굴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부부가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진은 안내를 따라서 연구실 정 중앙에 놓인 헤어 마네킹 앞에 섰다.
“아, 한유진 헌터님은 보고 형식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셔서 다행이에요. 예전 MKC 길드가 지원해줄 때는 의전 챙기는 게 밤새서 연구하는 것보다 힘들었거든요!”
피곤함이 섞여있는 들뜬 얼굴로 송은진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바로 다음날의 보고 준비를 위해서 날을 새운 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한유진은 권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 그리고, 이전에 말씀드릴 때는 단발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었죠. 하지만 이번에 수담이 담당하고 있다가 마찬가지로 헌터협회로 넘어온 호수형 던전에서 얻은 부엽토에서 모종을 배양하면 어깨길이 정도까지의 성장도 가능합니다.”
한유진은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회귀 전에는 5년이 지나도록 발모제의 발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슬라임 던전으로 행패를 부리던 MKC 때문에 다른 부산물을 이용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길드장이나 후원자들이 이 이미 잘 팔리는 발모제의 개선에 투자할 성격 같지도 않았다.
“던전에서 나온 식물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비각성인의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헌터도 아닌 제가 몇 개월이나 사용하고 다니는 동안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머리 위에서 김 양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는 발표자의 농담에 한유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몇 개월이었지만 5년 넘는 시간동안 발모제에게 공격당했다는 케이스는 들은 적이 없었다. 사용할 일이 없었던 사람은 그게 식물인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성공적인 발명이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혹시 질문이 있으신가요?”
한유진은 자신을 향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품이라는 걸 알고 있고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한유진의 관심사는 발모제, 아니 발모 식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D&L 바이오가 투자를 받기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실제로 다양한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서 애썼다면 그가 말해둔 던전 촬영용 식물의 진척도는 얼마나 될 지 궁금했다. 투자자다운 생각이라고 석시명이 들으면 근사한 목소리로 말할 생각을 하며 한유진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투자한 보람이 있는 발표였습니다. 사실 발모제는 거의 완성단계였는데 기대한 것 보다 잘 나와 준 것 같네요. 혹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촬영용 식물의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한유진의 말에 마이크를 넘겨받은 송은진은 잠시 후에 안내해준다고 말했고 그래서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촬영용 식물? 형 그런 거에 관심이 있었어?”
“음, 처음에는 블랙박스 같은 걸 생각한 거였는데. 네가 말한 풍경도 볼 수 있고 좋을 것 같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귓가에 속삭여 오는 동생에게 한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해당사항이 없는 발모식물보다는 그편이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체온이 더 뜨끈한 것 같다고 느끼면서 한유진은 동생이 고개를 갸웃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형이 가끔 어디까지 생각하는 지 알 수가 없어.”
“네가 보는 걸 같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한유현은 입술을 삐쭉이면서 그렇게 말했고 한유진이 말해줄 수 있는 건 그게 다 였다.
**
잠시 후에, 한유진은 새로 꾸렸다는 던전 촬영용 식물의 연구실로 안내 받았다. 비교적 정리되어있는 발모제 연구실에 비하면 기괴하고 다양한 모양의 식물들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주색 양파같이 생긴 식물의 양분주머니가 꿈틀거리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쥐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었다. 케이스에 흡착해서 진액을 줄줄 흘려대고 있는 식물도 있었다. 마치 식물종 던전의 브레이크가 이 연구실 안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지금 단계에서는 비슷한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식물은 다 채집해 오느라 이렇게 되었네요. 그 식물은 다른 마수를 잡아먹고 그 마수의 스킬이나 기억을 흡수할 수 있는데 기억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촬영에 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채집해 왔습니다.”
한유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연구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해주었다. E급 헌터라더니 비각성인보다는 비위가 좋은 듯 했다.
“형, 속이 안 좋아?”
물론 징그러운 모양새였지만 공포저항이 없더라도 헌터경력만 5년이 넘는 한유진이 비위가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유현이 알고 있는 한유진은 던전에 몇 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초보 헌터였으므로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유진은 제멋대로 자라난 마수들에게서 눈을 돌려 잘생긴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슬기가 남은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굽이쳐서 잘생긴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 아래에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에는 한유진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찌푸려지는 미간의 주름을 한유진은 손을 뻗어서 문질러주었다.
“형은 괜찮아.”
이런 배경으로 보고 있자니 동생의 잘생긴 얼굴은 눈이 시원해 질 정도로 좋은 것이었다. 찬찬히 뜯어봐도 잘생겼고 눈이 부신 한유현의 얼굴 뒤쪽으로 한유진은 이 연구실에 어울리지 않는 식물을 발견했다. 파란 장미 한 송이가 연구실의 입구 가장 가까이에 놓여있었다.
“파란 장미네요? 드물긴 한데 이게 던전 촬영과 관계가 있나?”
“아, 아뇨 그건 관상용입니다. 그런데 한유진 헌터님께도 이게 파란 장미로 보이시나요?”
“어딜 보나 파란 장미 아니에요?”
한유진은 자신이 독저항과 저주저항을 꺼놓았는지 잠시 생각했다. 모두 멀쩡하게 켜져 있었고 여전히 눈앞의 식물은 파란 장미로 보였다. 블루의 눈동자 같은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사실은 이것도 마수종이거든요. 이걸 채집해 온 헌터는 분홍 카네이션으로 보였다고 했는데, 던전에 왜 분홍색 카네이션이 보이는지, 그리고 채집해야할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던전 밖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설명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채집하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게 옳은 일 같았다고 설명해주더군요.”
“충분히 저주의 일종처럼 들리는데요?”
“매혹으로 분류되는 것 같아서 저주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단 저주저항 아이템을 껴도 반응은 없었거든요. 은신스킬의 일종일거라고 추측하는 직원도 있었는데 일단 봄이 되면 벚꽃으로 보이는 사람이 늘고 겨울에는 트리로 보이는 사람이 늘어서 관상용으로 두고 있어요.”
화분에 꽂혀있는 영양제를 보면 제법 정성스럽게 키우는 식물인 것 같았다. 시중에서 파는 영양제가 아니라 연구소에서 만든 물건인지 플라스틱 통에 매직으로 영양제라고 쓰여 있었다. 화분 밑에 달린 바퀴를 보면 햇빛 좋은 날은 창가로 이동시켜주는 것 같기도 했다.
“더구나 파란 장미라고 하면 이 연구소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지금은 기적처럼 현실화 되었다는 점에서요.”
합리화를 완벽하게 마친 연구원을 한유진은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무해한 식물일지는 몰라도 정신계통으로 영향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형한테는 저게 파란 장미로 보여?”
“응, 유현이 너한테는 뭘로 보이는데?”
한유진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는 한유현에게 등을 바짝 붙여서 밀착했다. 스스로의 독저항이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찜찜하기는 했다. 한유현의 대답이라면 프리지아가 아닐까 하고 한유진은 생각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사준 꽃다발이 마음에 든다고 향기를 맡던 한유현의 얼굴을 한유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그냥, 말라비틀어진 나무로 보여.”
“그래?”
“응. 굵은 줄기가 여러 겹으로 얽혀있는 나무네. 이파리는 하나도 없고.”
“그건 처음 듣는 경우네요. 스탯에 영향을 받는 걸까요?”
안경을 고쳐드는 연구원을 한유진은 무시했다. 다른 가설이 한유진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걸 연구원에게 말해줄 의무가 없는 탓이었다.
“나도 형이랑 같은 걸 보고 싶었는데.”
“그럼 우리 돌아갈 때 꽃을 사갈까?”
“그래. 형이 좋다면.”
두 분의 사이가 좋으시다고 웃는 연구원에게 마저 설명을 듣고서 한유진은 D&L 바이오의 건물을 나왔다. 진전이 되는 대로 연락드리겠다는 연구원의 얼굴은 잔뜩 들떠 있었다. 연구자들은 조금씩 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석하얀이 들으면 서운해 할 생각을 한유진은 잠깐 했다.
**
마수사육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유진은 약속한대로 꽃집에 들렸다. 가게 밖에 내놓은 화분마다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이 놓여있었다. 한유진은 던전부산물로 만든 화분도 판매한다고 적혀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꽃이 있나 둘러보고 있으면 한유현은 그런 한유진의 한걸음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아, 삐약이가 먹으면 안 되는 꽃이 있을 수 있겠다.”
“삐약이가?”
“응, 동물병원 알바하면서 알게 된 건데 고양이나 개를 키울 때 집에 들이면 안 되는 식물들이 있거든. 피스나 블루 같은 애들이면 몰라도 삐약이는 프급이잖아.”
한유현은 그 새가 먹고 싶어 하는 건 마석밖에 없을 거라는 말을 삼켰다. 그게 귀여운 외형을 하고 있어도 마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이었다. 한유진은 한유현도 걱정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보듬어오는 것이 형의 애정이었다.
“그래보여도 마수야, 괜찮을 걸? 독으로 뚫은 구멍을 지나가도 멀쩡했다며.”
“그런가.”
“정 신경 쓰이면 내 방에 둘까? 형이 보러 오면 되니까.”
“괜찮아, 다른 꽃을 사면 되니까.”
한유현은 한숨을 쉬고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있는 가게 주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저것도 같이 주세요.”
“작약이랑 장미, 그리고 카네이션이요? 여기에 폼폼도 같이 넣으면 예쁠거에요.”
“그것도 같이 넣어주세요.”
한유현이 알기로 그의 형은 꽃송이가 크고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아서 형의 눈길이 오래 머무른 꽃들을 가리키면 주인은 신난 얼굴로 통에 담가 둔 꽃송이를 꺼내서 끄트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어, 야. 유현아.”
형이 말리기전에 완성 된 꽃다발을 받아든 한유현은 돈을 건네고 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형, 이 꽃 예쁘지 않아?”
한유현은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 기울이고 그렇게 말했다. 그 동작에 차에 타자마자 뭐라고 말하려던 형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한유현은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것을 본다는 듯이 한유진의 입매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예쁘지. 그래도 동물한테 위험한 식물인지 확인을 하고 사면 더 좋았잖아.”
“미안해, 형한테 주고 싶어서 그랬어.”
한유진은 꽃다발을 들고 있으니 정말 무슨 명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잘생긴 얼굴에 더 화를 내지 못했다. 꽤 커다란 꽃다발인데도 어깨가 넓어서 그런가, 그렇게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은 우리 이거, 데이트잖아.”
한유진은 손바닥을 들어서 얼굴을 감쌌다. 귓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유현아 너는, 정말 너무, 귀여워서.”
“형, 유현이 귀여워?”
한유진은 이제 말을 하지 못하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가리는 손을 잡아 꽃다발을 쥐어주면 상기된 얼굴이 꽃다발위에서 배회했다. 그 달아오른 뺨에 얼굴을 맞대면 형의 체취가 꽃의 향기와 섞여 한유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떨리는 입술이 한유현의 턱을 스치고 지나가 웃고 있는 그의 입술위에 포개졌다. 양 뺨을 감싼 형의 손이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지. 우리 유현이.”
한유현은 그의 형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을 듣고 웃었다. 한유현의 세상에서 오직 사랑스러운 건 그의 형뿐이어서 한유현에게는 그의 형 외에는 귀여운 것도 예쁜 것도 사랑스러운 것도 없었지만 형의 유일이 되지 못하더라도 언제라도 첫 번째라면, 한유현은 다른 모든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걸 참는 건 한유현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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